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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다카시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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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구치 다카시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이자 코치이다.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와 간사이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한큐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여 신인왕과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8년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으나 부상으로 1982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한큐/오릭스,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 코치로 활동했으며, 간사이 대학 야구부 어드바이저리 스탭으로도 활동했다. 그의 주 무기는 프로 야구 역사에 남을 정도의 강속구였으며, 1977년에는 153km/h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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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다카시 (야구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선수명야마구치 다카시
원어명Takashi Yamaguchi
일본어 표기山口 高志
출생지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미야가와초
생년월일1950년 5월 15일
신장169cm
체중78kg
수비 위치투수
투구/타석우투/우타
한신 코치 시절의 야마구치 다카시
2012년 8월 17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
선수 경력
고등학교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
대학교간사이 대학
실업팀마쓰시타 전기
프로 입단한큐 브레이브스 (1975 ~ 1982)
드래프트1974년 1순위
첫 출장1975년 4월 11일
마지막 경기1982년 9월 3일
코치 경력
코치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 (1983 ~ 1998), 한신 타이거스 (2003 ~ 2004, 2009 ~ 2015)

2. 선수 시절

山口 高志|야마구치 다카시일본어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로 활약하며 고시엔 대회에서 다키가와 고등학교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 학교에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학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입학 초기에는 뼈의 발육 이상 등 신체적인 문제로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다카기 감독의 부임을 계기로 야구에 대한 의지를 다잡고 맹연습을 거듭했다. 3학년 때는 춘계 및 하계 대회에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효고 현 대회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간사이 6대학 리그 통산 기록
기록 종류기록 내용
통산 최다 승리46승
연간 개인 최다 승리18승
리그전 21연승
통산 최다 완봉 승리19승
1시즌 최다 완봉 승리6승(2회)
통산 최다 탈삼진497개
1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100개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68이닝 연속 무실점
6경기 연속 완봉
노히트 노런도시샤 대학 3차전(1971년 추계 대회)



4학년 때는 제1회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 메이저 리그 MVP 선수를 포함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3승을 기록하며 최고 수훈 선수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대학 선배인 무라야마 미노루와 연관되면서 ‘무라야마 2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28]

대학 졸업을 앞둔 1972년 10월, 프로팀 입단 거부를 선언했지만, 야쿠르트 아톰스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다. 이후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하여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하다가, 1974년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1975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시범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정규 시즌 초반에는 2경기 연속 KO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18차례의 완투와 시즌 12승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129]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4경기에 등판,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했다.[129] 1978년에는 중간 계투로 전향, 시즌 최다인 14세이브를 기록하여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 열린 일본 시리즈에서 타격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쳤고, 1979년 이후에는 왼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을 느껴 성적이 침체되는 등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통산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했고, 2년 뒤인 1982년에는 8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에서 태어난 야마구치 다카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로 활약하며 고시엔 대회에서 다키가와 고등학교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 학교에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학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입학 초기에는 뼈의 발육에 이상이 생기는 등의 신체적인 문제로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다카기 감독의 부임을 계기로 야구에 대한 의지를 다잡고 맹연습을 거듭했다. 3학년 때는 춘계 및 하계 대회에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효고 현 대회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간사이 6대학 리그 통산 기록
기록 종류기록 내용
통산 최다 승리46승
연간 개인 최다 승리18승
리그전 21연승해당사항 없음
통산 최다 완봉 승리19승
1시즌 최다 완봉 승리6승(2회)
통산 최다 탈삼진497개
1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100개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해당사항 없음
68이닝 연속 무실점해당사항 없음
6경기 연속 완봉해당사항 없음
노히트 노런도시샤 대학 3차전(1971년 추계 대회)



4학년 때는 제1회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 메이저 리그 MVP 선수를 포함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3승을 기록하며 최고 수훈 선수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대학 선배인 무라야마 미노루와 연관되면서 ‘무라야마 2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28]

대학 졸업을 앞둔 1972년 10월, 프로팀 입단 거부를 선언했지만, 야쿠르트 아톰스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다. 이후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하여 사회인 야구팀에서 활동하다가, 1974년 드래프트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의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2. 2. 프로 선수 시절

1975년,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시범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정규 시즌 초반에는 2경기 연속 KO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18차례의 완투와 시즌 12승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129]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4경기에 등판,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했다.[129] 1978년에는 중간 계투로 전향, 시즌 최다인 14세이브를 기록하여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 열린 일본 시리즈에서 타격 연습 도중 허리를 다쳤고, 1979년 이후에는 왼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을 느껴 성적이 침체되는 등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통산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했고, 2년 뒤인 1982년에는 8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3. 은퇴 후

1983년부터 1998년까지 한큐와 오릭스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1988년까지 2군 투수 코치를, 1989년부터 1군 투수 코치를 담당했다. 1991년부터는 1군 투수 코치 2인 담당 체제에서 서브를 담당했고, 1995년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노무라 다카히토, 스즈키 타이라, 히라이 마사시 등을 기용한 계투 체제를 구축, 팀의 파리그 2연패1996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1997년부터 2년간 메인 코치를 맡았다.[81][82][83][84][85][86]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오릭스 간사이 지역 담당 스카우트로 활동, 오쿠보 가쓰노부 등 선수 영입에 힘썼다.[84][86]

2003년 한신 타이거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의 요청으로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87] 후쿠하라 시노부 재활을 도왔고,[88] 후지카와 규지 투구폼을 교정, 구원 투수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했다.[89][90]

2005년부터 한신 구단 투수 담당 스카우트로 활동하며 이와타 미노루를 희망 입단 제도로 입단시켰다.[91]

2009년 한신 1군 투수(불펜) 코치로 복귀, 7시즌 동안 구원 투수진을 정비했다. 그러나 2015년 구원 투수진 부진으로 계약이 갱신되지 않아 한신을 떠났다.[92][93]

한신 퇴단 후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적합 인정을 받아[94][95] 아마추어 선수 지도 자격을 획득했다. 2016년부터 간사이 대학 야구부 어드바이저리 스탭으로 복귀,[96] 2019년 제50회 메이지 신궁 야구 대회에서 팀을 47년 만의 첫 승리와 결승 진출로 이끌었다.[97] 가네마루 유토 성장에 조언을 주기도 했다.[98][99]

2022년 6월 6일 도쿄 돔에서 열린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시구식에 참가했다.[100]

4. 플레이 스타일

야마구치 다카시는 커브도 던질 수 있었지만, 투구의 대부분은 프로 야구사에 남을 정도의 속구였다.[128] 컨트롤은 좋지 않았고 볼넷이 많은 투수였다.[128] 속구를 무기로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 시대를 지탱했다.[101]

특기할 만한 점은 속구형 투수에게 장신 선수가 많은 가운데,[102] 169cm의 작은 키로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손꼽히는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101] 작은 키에서 높은 구속을 만들어낸 것은 팔을 머리 위로 뻗어 원을 그리듯이 휘두르는 "암 던지기"에 상반신을 굽히는 동작을 더한 독특한 폼이었다.[103] 이 폼은 체간을 포함한 강인한 근력을 필요로 했다.[104] 투구 동작에서 오는 충격은 허리에 가해지는 형태가 되어, 결국 부상을 가져왔다.[103][105]

전 투수이자 지도자가 된 호리이 츠네오는 "암 던지기"에서는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릴리스 포인트가 거의 한 점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대가로 컨트롤은 나빠진다고 지적했으며, 실제로 야마구치는 삼진에 대한 볼넷의 비율이 1/2을 넘었다.[104]

야마시타 다이스케는 야마구치의 투구 내용이 "거의 스트레이트(직구)"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하라 하루키는 직구로 몰린 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종의 커브로 잡아내어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108]

허리를 다친 후에는 새로운 변화구도 습득했지만, 직구를 대신할 무기로 삼기에는 이르지 못했다. 야마구치는 "새로운 변화구는 시합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데 3년이 걸린다. 지금 공이 통하지 않게 된 후 연구해도 늦다"고 회고했다.[110] 하지만, 자신의 현역 인생에 대해서는 "저는 80퍼센트로는 던질 수 없다. 그래서 하위 타선이든 항상 전력 투구. 이렇게 작은 몸으로 그런 일을 계속했으니, 4년 만에 망가져도 당연하다. 후회는 전혀 없다[43]", "제 폼은 변화구 투수의 그것이 아니다. (중략) 파워 투수였다"라고 말했다.

후쿠모토 유타카는 야마구치가 3년째 되던 해에 폼이 장래에 부상을 초래할 것을 충고했지만, 야마구치는 "나는 굵고 짧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4. 1. 구속에 관한 평가

야마모토 고지는 2007년 시점에서 "다카시가 던진 공이 제일 빨랐다"라며 "초속과 종속의 차이가 별로 없는 투수"라고 평가했다.[101]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다카다 시게루는 "야마구치는 분명히 에나쓰보다 빨랐다"라고 말했다.[101] 롯데 오리온스전에서 무라타 조지가 완봉승을 거둔 뒤, 가네다 마사이치 롯데 감독은 "조지보다는 분명히 빠르다. 조지는 영구히 야마구치한테 이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101] 무라타 고이치 전 퍼시픽 리그 심판부장은 "야마구치가 구속 No. 1"이라고 단언했다(2007년).[101]

5. 상세 정보

야마구치 다카시는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투수외야수를 맡았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로 뛰었다. 고시엔 대회에서 다키가와 고등학교의 활약을 보고 감동받아 진학을 목표했지만, 학비 문제로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춘계와 하계 대회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효고 현 대회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4학년 때는 제1회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여 메이저 리그 MVP 선수를 포함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3승을 기록하며 최고 수훈 선수상을 받았다. 대학 선배인 무라야마 미노루와 연관되어 ‘무라야마 2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28]

1972년 10월, 프로팀 입단 거부를 선언했지만, 야쿠르트 아톰스가 드래프트 4순위 지명을 강행했다. 야마구치는 야쿠르트의 지명을 거부하고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했다.[129]

1974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한큐는 선수 계약 외에 60세까지의 고용 계약을 제시하는 이례적인 대우를 했다.[45] 1975년 12승 1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3][54][55]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5경기에 등판,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54] 1978년에는 13승 4패 14세이브의 성적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70]

은퇴 후에는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1983년 ~ 1998년)와 한신 타이거스(2003년 ~ 2004년, 2009년 ~ 2015년)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특히 한신에서는 후지카와 규지 등을 육성했다.[129]

최우수 구원 투수(1978년), 신인왕(1975년), 일본 시리즈 MVP(1975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투수상(1975년)을 각각 1회씩 수상하였다.

5. 1. 출신 학교


분류: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 출신

분류:간사이 대학 출신

5. 2. 선수 경력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출신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투수외야수를 맡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로 뛰었고, 고시엔 대회에서 다키가와 고등학교의 활약을 보며 감동받아 진학을 목표했지만, 학비 문제로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교 입학 초기에는 뼈 발육 문제로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지만, 신코 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한 다카기 감독을 만나 야구에 대한 의지를 되찾았다. 3학년 때는 춘계와 하계 대회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효고 현 대회에서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간사이 대학에 진학하여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통산 64경기 등판, 46승 11패, 평균자책점 0.92, 497 탈삼진
  • 노히트 노런: vs 도시샤 대학 3차전(1971년 추계 대회)
  • 통산 최다 승리: 46승
  • 연간 개인 최다 승리: 18승
  • 리그전 21연승
  • 통산 최다 완봉 승리: 19승
  • 1시즌 최다 완봉 승리: 6승(2회)
  • 통산 최다 탈삼진: 497개
  • 1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 100개
  •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 68이닝 연속 무실점
  • 6경기 연속 완봉


4학년 때는 제1회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하여 메이저 리그 MVP 선수를 포함한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3승을 기록하며 최고 수훈 선수상을 차지했다. 대학 선배인 무라야마 미노루와 연관되어 ‘무라야마 2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28]

1972년 10월, 프로팀 입단 거부를 선언했지만, 야쿠르트 아톰스가 드래프트 4순위 지명을 강행했다. 야쿠르트의 지명을 거부하고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했다.

5. 2. 1. 사회인 시대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하여 마쓰시타 전기 야구부에 입단했다.[129] 마쓰시타 전기에 입사한 이유는 “세계의 일류 기업인 마쓰시타라면 프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정년까지 부지런하게 일할 수 있어서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129] 그러나 샐러리맨으로 일하면서 야구를 할 때 “일도 야구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보다 과감히 최고봉에서”라는 기분이 들어 야구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129]

5. 2. 2. 프로팀 경력

한큐 브레이브스(1975년 ~ 1982년)에서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1974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당시 지명 순서는 예비 추첨으로 정해졌는데, 긴테쓰 버펄로스가 1순위였지만 지명을 회피했고, 한큐는 2번째였다.[41] 야마구치는 아마추어 일본 대표팀으로 쿠바 원정 중이었고, 지명 소식은 멕시코에 들어간 12월 2일에 알게 되었다.[42] 귀국 후 한큐에 입단하기로 결정했다.[43] 한큐는 선수 계약 외에 60세까지의 고용 계약을 제시하는 이례적인 대우를 했다.[45] 등번호는 미야모토 유키노부가 달았던 '14'번으로 결정되었다.[45]

1975년 개막 전 오픈전 5경기에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방어율 3.66을 기록했다.[46] 정규 시즌 첫 등판에서는 패전 투수가 되었고, 두 번째 경기에서도 많은 실점을 했다.[47] 그러나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의 도이 마사히로후쿠모토 유타카에게 야마구치의 직구가 치기 어렵다는 말을 한 것을 계기로 직구 중심으로 투구 패턴을 바꾸었다.[43][48] 첫 선발 등판 경기에서는 9할 가까이를 직구로 던져 1실점 완투승을 거두었다.[48] 전기 리그에서 7승 5패를 기록하며 팀의 전기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헹가래 투수가 되었다.[49] 시즌 동안 32경기에 등판하여 12승 1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93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3][54][55]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5경기에 등판, 1승 2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54]

1976년에는 마무리 투수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졌다.[58] 야마다 히사시는 야마구치를 보고 자신의 구속으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싱커를 습득했다.[58]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기용된 야마구치에 대해 아다치 미쓰히로는 "너무 혹사당했다"고 평가했다.[58] 일본 시리즈에서는 5경기에 등판하여 1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61]

1977년에는 등판 42경기 중 선발 13경기에 출전했고, 마무리 투수 비중이 더 늘었다.[66]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릴리프로 등판한 것이 유일했다.[68]

1978년에는 거의 릴리프 투수로 전담하게 되었다.[69] 13승 4패 14세이브의 성적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획득했다.[70]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아리마 온천 축승회에서 열린 골프 대회에서 부상을 당해, 시리즈 3차전 이후 등록이 말소되었다.[71][72]

부상 이후 투구 감각이 회복되지 않아 1979년 시즌 중에는 두 번이나 2군으로 내려갔다.[75]

1980년 5월 28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경기(가와사키 구장)에서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통산 3000안타를 허용했다.[77] 이후 왼쪽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1군과 2군을 오갔다.[77]

1981년에는 4월 하순에 2군으로 내려간 후 시즌 종료까지 1군에 복귀하지 못했고, 3경기 등판에 그쳤다.[79]

1982년에도 성적이 회복되지 않았고, 9월 3일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9회에 7실점을 한 것을 계기로 은퇴를 결심했다.[80] 10월 22일에 정식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75한큐3222184112131--.480840203.01691475131493079662.931.20
19763519152012109--.545821197.21561891061524068622.821.25
197742131020101211--.455745179.21411685051514164613.061.26
197842210013414--.765519122.290116017956043382.791.22
1979160000106--1.00013632.019423232600771.971.31
1980171000133--.25013628.02753110121016165.142.07
198130000000------429.0132302410111111.001.78
198281000110--.5008515.024215001100201710.202.60
통산:8년195584481504344--.5383324787.0639723835266001913082783.181.30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5. 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1983년부터 1998년까지 친정팀인 한큐와 오릭스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고, 2003년부터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 코치를 맡아 후지카와 규지 등을 육성했다.[129] 2005년부터는 한신의 서일본 지구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다시 한신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투수 코치(1983년 ~ 1998년)
  • 1988년까지 2군 투수 코치를 담당했다.[81]
  •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구단 경영권이 양도되어 구단명이 '오릭스 브레이브스'가 된 1989년부터는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81][82]
  • 도이 쇼조가 감독으로 취임하고 구단명이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된 1991년부터는 1군 투수 코치를 2명이 담당하는 체제로 이행했기 때문에 야마구치는 서브 담당이 되었다.[83]
  • 1995년에는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노무라 다카히토, 스즈키 타이라, 히라이 마사시 등에 의한 계투 체제 구축에 진력했다.
  • 1995년부터 파・리그 2연패 및 1996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꺾고 오릭스 최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81][84][85]
  • 야마다가 1996년을 끝으로 오릭스를 퇴단함에 따라 1997년부터 2년간은 야마다로부터 메인 코치 자리를 이어받았다 (서브 코치는 칸베 토시오).[86]
  • 한신 타이거스 투수 코치(2003년 ~ 2004년, 2009년 ~ 2015년)
  • 2002년 시즌 종료 후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당시)인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코치 취임을 요청받은 것을 계기로, 2003년 2군 투수 코치로 한신으로 이적했다.[87]
  • 한큐에 입단할 때 제시되었던 "60세까지의 고용 계약"이 오릭스 구단에도 승계되었기 때문에, 한신 구단에 그 취지를 전하자 "60세까지는 돌봐주겠다"는 답변을 얻었다고 한다.[87]
  • 2003년에는 오른쪽 어깨 수술 후 재활 중이던 후쿠하라 시노부에게 오른쪽 어깨에 부담이 덜 가는 투구 폼을 지도하여 복귀로 이끌었다.[88]
  • 2004년에는 당시 2군에서 활약하지 못했던 후지카와 규지에게 오른쪽 무릎을 굽히며 침몰하는 투구 습관을 지적했다. 투구 시 오른쪽 무릎을 펴는 것과 함께 어깨와 팔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던지는 폼으로의 개조를 지도했다.[89] 그 결과, 릴리스 포인트가 지도 전보다 높아지면서 스트레이트의 뻗음과 각도가 현격히 향상되었다. 구계를 대표하는 구원 투수로의 길을 열었다.[90]
  • 2009년부터 한신의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했다. 불펜 담당 코치로서 7시즌 동안 구원 투수진 정비에 진력했다.
  • 2015년에는 구원 투수진의 평균자책점이 리그 최하위인 4.14로 부진했기 때문에, 시즌 종료 후 10월 15일에 구단으로부터 코치 계약 갱신 거부를 통보받았다.[92] 이 통보를 계기로, 한신을 퇴단했다.[93]


한신 퇴단 직후에는 고교・대학 야구 선수 지명에 필요한 학생 야구 자격 회복을 위해 학생 야구 자격 회복 연수를 수강했다. 2016년 2월 2일부로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자격 회복에 적합하다는 인정을 받았다.[94] "아마추어 선수도 부담 없이 지도할 수 있는 자격이 갖고 싶었다"고 하며[95], 이 인정을 계기로 어드바이저리 스탭으로서 간사이 대학 경식 야구부에 복귀했다.[96]

5. 4. 수상·타이틀 경력

야마구치 다카시는 최우수 구원 투수(1978년), 신인왕(1975년), 일본 시리즈 MVP(1975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투수상(1975년)을 각각 1회씩 수상하였다.

5. 4. 1. 타이틀

5. 4. 2. 수상


  • 신인왕 (1975년)[129]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75년)[129]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우수 투수상: 1회 (1975년)

5. 5. 개인 기록



; 첫 기록

  • 첫 등판: 1975년 4월 11일, 대 니혼햄 파이터스 전기 1차전 (고라쿠엔 구장)

5. 6. 등번호

연도등번호
1975년 ~ 1982년14
1983년 ~ 1998년74
2003년 ~ 2004년84
2009년 ~ 2015년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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